실은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어렸을때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사랑한다는 것이 정말 연인끼리 만나서 무슨 엄청난 감정이 오가야만 사랑인 줄 알았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고나서, 분명히 모두는 그 책을 읽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여행을 하며 느꼈던 그 모호한 감정들에 대해서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 누쿠스로 향하는 기찻길에서 만난 모녀, 짐을 싣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 짐들은 한 짐당 족히 20kg은 가뿐히 넘어보였다. 무거운 짐을 낑낑대며 천장의 짐칸에 싣으려는 모습을 보고 선뜻 도와주었다. 내릴 때도 짐을 내려주었다. 나의 선의가 고마웠는지 누쿠스에 도착해 나에게 안전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택시기사를 구해주었고 가격도 흥정해주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그 모호한 감정, 뿌듯함도 있었고 기쁨과 새로움 그리고 황홀함 그리고 또 하나의 모호한 감정이 느껴졌었다.
나는 30대가 되고 나서야 그 감정의 정의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주말마다 나에게 푸푸라고 하는 가나 전통음식을 요리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2015년에 방문했던 가나 였지만 2022년이 된 지금까지도 7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한 달에 한 번씩 전화를 해주는 친구다. 처음엔 귀찮기도 했었다. 어렸었고 도시에서의 삶, 타인에게 잘 보이기위해 아둥바둥 내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삶에 젖어 감정이란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던 때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친구의 행동들에서 이제야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면 나는 반대로 나에게 사랑을 준 이들에게 사랑을 주었는가 ?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는 사랑도 기술처럼 배워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이 나와있다. 나는 살면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배워보질 못했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터득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받고만 자랐다.
내가 자란 환경은 사랑을 받고만 자란 환경이었기에 나는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환경 탓이라고는 하고싶지 않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결론은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다.
지금 시기가 되어 나는 사랑을 주는 방법을 연습해가고 있다.
언젠가 위에서 언급한 친구들을 어딘가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는 내 사랑의 크기를 보여주고 싶다.